신중 하지만 속도가 너무 지나치게 느리다면 주님의 뜻을 쫓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젠가 어떤 미국 교회 리더십에게 안건 하나를 제안 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회 리더십은 그 안건을 처리 하는데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안건 처리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리더십들의 안건 처리 과정은 주님의 뜻 보다는 그들의 이성적인 계산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중함은 결국 성령의 인도에 따른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속도는 빠른데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 또한 주님의 뜻을 쫓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중 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린 경우 혹은 속도는 빠르지만 신중함이 결여된 경우 양쪽 모두 깨어 있는 삶은 아닙니다.
깨어 있는 삶은 균형을 갖춥니다. 깨어 있는 삶은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일단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때 부터는 속도 있게 추진 합니다. 또한 깨어 있는 삶은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사람안에 있는 죄성은 양 극단으로 치달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신중함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경우와 조급 하여서 급하게 서두르므로 지나치게 신중하지 못한 경우 입니다. 분명한것은 양쪽다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양 극단의 성향을 경계 해야 합니다. 대신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지나친 이성적 계산에 의한 생각을 멀리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말 부터 던져 놓는 신중함이 결여된 생각의 습관을 멀리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 한곳을 집중하는 결단이 필요 합니다. 그 한곳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하면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도 우리의 충동적이며 즉흥적인 생각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따르게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하여 신비스러운 일을 체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할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가질수 있다면 충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하면 성령께서 잠자던 영혼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리고 놓치고 있던 거룩한 열정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면 생각의 균형이 찾아옵니다. 생각의 균형이 찾아오면 결코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신중 하면서도 일단 결론에 이르고 나면 그때 부터는 강렬한 열정으로 놀라운 속도를 내면서 일을 추진해 갑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외치고 선포하며 나갑시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 나의 삶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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